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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9-18 01: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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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최초 1981년 `빠리 시립 따삐스리 아뜰리에 책임자`에 올라 1987년까지 7년간 근무했다. 사진은 농심호텔에서 포즈를 취한 이숙희 작가. `이숙희 따삐스리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오늘은 2) 전통의 전수(파리동양박물관 부속 아틀리에 이야기)편. 수영넷 Suyeong.net 강경호 기자




「수영넷 Suyeong.net」은 지난 9월 2일,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한 뛰어난 예술가를 재조명하는 코너를 [공지]했다. 이 코너는 예술가에 대한 소개와 함께 예술가의 작품과 사유(思惟)가 담긴 글을 몇 회에 나누어 게재할 예정이다. 이 코너를 통해 재야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예술가들이 혼신을 받쳐 일궈 온 작품세계가 소개되고, 평가받고, 상호 교감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빈다.


오늘은 이숙희 작가의 ‘이숙희(李淑姬) 따삐스리 이야기 - 1) 따삐스리의 간략한 소개’ <9월 5일자>에 이어, 2) 전통의 전수(파리동양박물관 부속 아틀리에 이야기) <9월 18일자>, 3) 전통과 재창조 로 나누어 작가의 글을 게재할 예정이다. 독자분의 많은 격려와 관심을 기대한다. - 수영넷 Suyeong.net 강경호 기자 -




2) 전통의 전수 (파리동양박물관 부속 아틀리에 이야기)



어떤 만남을 두고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나는 ‘계기’라는 말을 더 신뢰한다. 물론 계기는 아무렇게나 오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준비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기적처럼 다가온다.


나와 따삐스리(Tapisserie)의 만남도 그랬다. 1971년 프랑스 정부초청 국립장학생 자격으로 도불한 다음, 나는 노르망디의 깡 대학(Université de Caen)에 배치되었다. 어학보다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 거기서 판화를 배웠다. 이듬 해 파리로 옮겨 파리3대학(Université Paris-III)의 연극학과에 등록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미술계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물론이고 스치는 사람들의 모습, 거리, 풍경 하나하나가 정교히 설계된 듯 느껴지는 파리에서는 미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보였다. 보고 듣고 호흡하는 모두가 산 공부이고 자극제였다.


1975년 연극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나는 파리동양미술학교(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에서 서예와 동양화를 다시 배우는 것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나의 뿌리에 기초를 두고 출발하고 싶었던 소박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파리의 한 아틀리에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 아틀리에에서는 거대한 틀을 설치해 두고 거기다 날실을 팽팽하게 잡아맨 다음 씨실삼아 적당히 자른 천을 리본 모양으로 묶어 매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가가 처음 그려준 이미지대로 천을 배치하게 되므로 완성시켜 놓으면 아주 근사한 작품이 되었다. 음악과 대화와 책을 사랑하는 주인은 멋진 남자였고 아틀리에의 분위기는 따뜻했다. 나는 손이 빠르고 감각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그곳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시급이 터무니없이 낮았던 탓이다. 알고 보니 그 예술가는 손꼽히는 섬유예술가였고 우리가 대신 작업한 작품들이 고가로 팔리는 현대 따삐스리(La Nouvelle Tapisserie)였다.


나의 목적은 서예나 동양화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떠오른 것이 섬유예술가의 아틀리에에서 가졌던 경험이었다. 재료의 질감과 일을 할 때의 공간적인 체험이 내 기질에 맞는 것 같다.


그때 마침 파리 16구의 코미디 프랑세즈(Comédie Francaise) 출신 연극인 양로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회계보조로 추천해주어 거기서 받는 월급으로 사설 따삐스리 학원에서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몇 개월 후 원장이 C.R.E.A.R.라는 정부 설립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따삐스리 공부를 할 수 있다면서 추천서를 써주었다. 삐에르 다껭(Pierre Daquin)이라는 고블렝(Gobelins) 출신 유명 따삐스리 작가가 자신의 아틀리에와 함께 그곳에 소속돼 있다는 말도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 동안 작업한 습작 두 점을 들고 시험을 보러 갔는데, 다행히 다껭씨가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래서 나는 1987년부터 3년간 동양인 최초로 그곳의 학생이 되었다.


다껭씨는 머리와 손재주가 대단히 좋은 남자로 우선 보기에 재기가 넘쳐흘렀다. 열정과 패기는 물론이고 예술가적 자유분방한 인생을 누리는 삶의 철학도 뚜렷했다. 교수방법도 무척 특출해서 그 분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정규 학생 말고도 단기적으로 연수생을 받았는데 프랑스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 미술학과 학생이었던 이 연수생은 의문과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한번 결정하고 나면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 몫을 해내었다. suyeong.net




부속 아틀리에에서는 주문 생산을 주로 했는데 고전 작품의 재현 외에도 현역 화가들이 그림을 들고 와서 따삐스리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중동 지역으로 팔려 나간다고 했다. 스승은 직원들이 작업하는 그 과정을 학생들에게 현장에서 습득케 했다. 가령 유화 한 점이 어떻게 섬유예술로 탈바꿈해 다른 작품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지켜보고, 참여하고, 토론하게 했다. 수련 마지막 해에는 실습생 자격으로 아뜰리에의 일을 도울 수 있었지만, 나는 그리 환영 받지 못했다. 거의 기계적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내 속도가 너무 느렸던 까닭이다. 대신 초보 연수생을 맡아 지도했다.


나는 삐에르 다껭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그것을 습득하려 애썼다. 1분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도 그런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고블렝 국립아틀리에에서 1년간 연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추천 덕분이었다. C.R.E.A.R.로 되돌아 가 그의 조교로 1년을 더 머문 다음 나는 따삐스리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와는 별도로 1981년부터 나는 따삐스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파리시에서 시민들의 여가선용과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아울러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A.D.A.C.이란 문화재단을 역점 프로그램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시내 여러 곳에 개방수업을 열었는데 회화, 판화, 섬유예술, 도자기, 목공예 등 다양한 선택이 가능했다. 나는 4구 시청 부근에 있는 파리동양박물관 부속 따삐스리 아뜰리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6구에 있는 기이메 동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이 유물전시 중심이라면, 유서 깊은 마레지구(Le Marais)에 자리 잡은 이 박물관은 동아시아의 문물과 문화를 보여주는 것 말고도 순회 전시회라든가 현지의 악극단들을 초청해 공연을 하는 등 그야말로 살아있는 문화교류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 자기 도안으로 2단계 수업을 실현 중인 한 연수생. 미술에 자질을 가진 이 연수생은 전형적인 파리지엔느로 영리하고 감수성이 풍부해 그 뒤로 좋은 창작품들을 여러 개 완성했다. suyeong.net




이 아뜰리에에서 나의 명분은 중국 따삐스리 고서(古絲)를 전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양이든 동양이든 ‘짠다’는 원칙은 같다. 우선 날실과 씨실의 원리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원하는 색실로 이미지를 채워 넣는 것이다. 나는 4단계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스승 다껭에게서 빌려온 패턴을 이용해 기본원리를 익힌 다음, 2단계에서는 단순한 자기 도안으로 1단계를 활용하도록 지도했다. 그보다 조금 복잡하고 동양적인 모티브의 도안을 실현하는 것이 3단계 수업이었다. 그 이후는 완전히 수련생의 취향에 맡겨 본인이 원하는 것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뜰리에의 목표는 단순히 전통을 전수하거나 수련생들을 예술가로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가 원칙을 습득한 다음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가도록 도우는 것이었다. 옛 모델을 단순히 복사하게 하는 것으로 현대적 감성을 살려낼 수 없다. 제각기의 감수성을 가진 수련생 각자가 스스로 창조적 공간을 열 수 있도록 지름길을 모색했다. 해가 가고 경험이 쌓이자 그야말로 작품다운 작품을 완성해 내는 제자들이 늘어났다. 나중에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파리에서 가장 핫한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로 꼽히지만 30여 년 전만해도 마레지구는 비교적 한적했다. 원래 늪지대 (그래서 marais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였는데 매립을 한 다음, 17세기 전후에는 귀족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 무렵 세워진 작고 아름다운 교회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바로크 음악 연주회가 자주 열려 저녁 무렵이면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맛있는 유태인 반찬가게와 레스토랑들이 쭉 늘어선 길 에 있는 우리 아뜰리에를 나도 수련생들도 무척 사랑했다. 집에서 솜씨를 부려 구워온 따르뜨를 갖가지 차와 함께 간식으로 즐기던 기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1987년 귀국 전까지 따삐스리를 가르치면서 보낸 7년은 내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여기서의 체험이 내 박사학위 논문(고서에로의 복귀를 위하여 - 전통의 역할 : 재발견과 전수)의 한 뼈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뜰리에에 오는 수련생들은 대부분 동양에 매료되었거나 호감 정도는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정신분석가도 있었다. 심리학 논문을 준비 중인 다른 수련생이 어느 날 라깡의 부음을 전하기도 했다. 말이 너무 많아서 눈치를 받던 한 아주머니는 “선생님, 전에는 부분적으로밖에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사물을 통괄해서 볼 수 있어요.”라고 고백해 나를 기쁘게 했다. 1983년 우리는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교민들은 물론, 수련생들의 가족과 친지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suyeong.net



이숙희(李淑姬) (수영넷 Suyeong.net 고문, 전 국제신문 논설위원)




▶관련 기사, [공지] 이숙희 따삐스리 이야기 (http://suyeong.net/news/view.php?idx=869)

▶관련 기사, 이숙희(李淑姬) 따삐스리 이야기 - 1) 따삐스리의 간략한 소개

(http://suyeong.net/news/view.php?idx=877)





[덧붙이는 글]
한 사람의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한 뛰어난 예술가를 찾아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의 치열하고 빼어났던 창작의 유산이 지구촌 어디에선가 있음에도, '크리에티브'와 '작가정신'을 외면하고 교감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같은 시대, 같은 작업을 공유한 '작가적 양심'은 그래서 더 빛이 난다. - 수영넷 Suyeong.net 강경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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