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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16 0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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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담의 서화만평 海潭의 書畵漫評(55)


- 전통 서예와 실존주의 철학(2)



☛  라캉은 인생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면서 생후 6개월부터 18개월까지의 유아기를 상상계라 하였다. 이 시기 엄마와의 경험(요구, 욕구)이 인간 욕망의 원인이라 한다. 피할 수 없는 욕망, 결코 만족될 수도 없는 욕망에 시달리다 죽는 것이 인생인 샘이다. 달리 말해 ‘3세 버릇 80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 상상계에서의 요구와 욕구 사이의 불만족은 잠재의식으로 남고 이것이 삶에 큰 영향[욕망, 삶의 동력, 지혜 등]을 미치게 된다.

  동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짐승 새끼들이 어릴 때 어미로부터 먹이를 취하는 법이나 방어하는 법을 배우고, 이것을 동료 새끼들과 수시로 실습(학이시습)하여 익힌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아무리 호랑이 새끼인들 얼마나 살아남을까? 생존 교육이 없는 물고기의 생존율은 지극히 낮다. 반면에 인간은 생존 훈련기간이 대단히 길다. 전 인생을 통해 배운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상징계에 진입해서도 여러 가지 놀이는 물론 위인전, 동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 내용은 대개 권선징악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생존을 위한 학습이라면 온전하게 생존에 도움이 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반대가 더 많기 때문이다.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더 잘 살며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권악징선(勸惡懲善)을 권장해야 하나 이럴 수는 없다. ‘세상은 옛날부터 악이 득세하며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니 도덕은 생각말고 악을 가까이 하라!’ 할 수는 없다. 피교육자가 이런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가 건강하려면 권전징악이 숭상되고 반복 교육해야 한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한 사람이 결국 승리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는 내용이다. 선을 존중한 교육은 태초의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 살아야 하기에 그렇다. 무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 선한 행동을 하는 자가 많아야 한다. 너무나 오랜 기간 권성징악, 선교육이 강조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사회적 DNA로 새겨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교육효과일 뿐 잠시라도 그만두면 악이 두드러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래적)서예도 하나의 선교육이고,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할 사회교육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와의 관계는 각각 고전철학과 실존주의 철학과의 관계로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전통서예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듯 고전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편의상 구분으로, 고전철학은 개인의 개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보편적 표현, 서법, 법첩)을 우선하고, 모든 개별자는 보편을 중시한다 하겠다. 그리고 고전철학이 존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개념을 규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개념은 모든 것이 그러해야 하는 것이기에 개념으로서의 철학은 보편성을 가진다. 보편성의 본질은 규범이고, 개별자는 보편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인 것 같았으나 사람의 일에 영원한 것은 없다 했듯이 19세기 말 경부터 이전의 합리주의 관념론이나 실증주의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반면, 키르케고르(1813~1855, 덴마크)와  니체(1844~1900, 독일) 등에 의해 인간의  주체적  존재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어서 야스퍼스(1883~1969, 독일), 마르셀(1889~1973, 프랑스), 하이데거(1889~1976, 독일), 사르트르(1926~1980, 프랑스) 등이 이를 계승하면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실존주의가 번성(繁盛)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고전철학은 더욱 빛을 잃고 실존주의가 득세하였는데 양차대전(兩次大戰)이 하나의 기폭제였다. 사실, 양차대전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온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동북아에서는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서양문물이 유입되는 등 정치사회적 영향은 컸으나 동북아의 전통 사상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반면에 서양은 개벽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변했다. 양차대전의 참상을 경험하게 된 20세기 철학자들은 과거 철학의 허구성(2원론, 형이상학 등)을 자각하고 여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의 삶은 개인의 자질, 능력, 개성, 환경 등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 동일 조건으로 살아가지도 않고 살아갈 수도 없다. 이상이나 희망이 다름에도 보편 이념을 따르라고 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어쩔 수 없이 억압된다. 19세기 후반 사람들은 맞지 않는 구두를 싣는 것과 같이 사회가 말들어 놓은 규법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불행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전주의의 모순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군대와 같은 집단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의 개성을 상실한다. 같은 목적으로 많은 사람과 어울리려면 그들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라야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집단생활에서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개인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수동적 맹적적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고전철학의 모순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편주의, 본질주의를 거부한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실존’은 탈출(ex-)을 뜻한다. 즉, 본질에서 탈출하는 것, 보편적 삶에서 탈출하는 것,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실존이며, 현존재(인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의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이것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자기 삶의 주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삶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유 민주국가의 통상적 정서에 걸맞은 실존주의는 특히 미술, 영화,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미술 중에서도 서예의 경우는 좀 다르다. 전통서예는 고전철학의 전형이나 아직도 전통서예의 흐름이 거의 전부이고 실존주의라 할 현대서예의 영향은 미약하다. 왜 그럴까? 직접적 이유는 공모전의 영향이라 하겠으나 이는 작은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동북아 철학, 특히 공자학, 선비학 등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고, 좀 더 확장하여 동서양 철학과 문화예술의 흐름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서예의 세계화’란 말이 있다. K팝이 그러하듯 우리의 입장에서보면 서예의 세계화는 구호가 아니라 당연하다. 어쩌면 계몽의 문제라 생각할 수 있으나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문학이면 또 몰라도 글을 예쁘게 잘 쓴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서예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 심지어 신성으로 숭상되나 서구인은 이러한 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서예는 이미 19세기에 힘을 잃은 고전철학과 형식상 닮아있다. 옛부터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려라’, ‘플라톤의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등 동서양을 불문하고 과거에 집착하거나 편안한 현재에 머물지 말고 미래로 도전해야 한다는 경구(警句)가 많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도 다르지 않고 『어린 왕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인데 모두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통)서예창작의 제1 구호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해, 전통서예에서 개념, 형식, 규칙을 지켜야 한다면서도 실존주의적 창작을 말하는 것은 고전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을 동시에 권장하는 것과 같고,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다시 말해, 서예가는 누구나 창작을 말한다. 이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여기서는 서예를 예술로 볼 것인가? 미술로 볼 것인가? 고전주의를 따를 것인가? 실존주의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로 보았다. 이들 각자는 그대로 살아있고, 언제까지나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자양분이다. (차호에 계속)  



해담 오후규 (서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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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서예와 실존주의 철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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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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