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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4-06 20: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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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潭의 書藝漫評


"현대는 지나친 규격화시대이다. 모든 공산품은 규격화되어있고, 우리의 정서는 여기에 점점 메말라 간다. 서화디자인은 이러한 우리의 기계적 환경을 좀 더 인간적 환경으로 순화시킬 수 있으며 서화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해담(海潭) 오후규(吳厚圭) 선생이 밝힌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의 창립 배경의 한 내용이다.

뉴스부산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회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15번째 시간으로 "뒤샹의 혁신과 원효 대사의 역발상"를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newsbusancom@daum.net -





▲ 아담과 이브, 뒤샹, 1910~1911, 캔버스에 유화, 114.8x128.9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인상주의 성향을 버린 뒤샹은 윤곽이 강하고 장식적이며, 자연적이지 못한 색채를 사용했다.





(15) 뒤샹의 혁신과 원효 대사의 역발상



☛ 현대의 미술은 ‘정의할 필요조차 없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야말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가 언급한 ‘미술의 종말’ 상태이며, 좋게 말하면 언제 끝날지 모를 ‘미술의 유토피아’이다. 과거 철학자들이 공들여 규정했던 미술의 개념이 무슨 연유로 이렇게 풀어졌을까? 여기에 가장 크게 작용한 사람은 프랑스계 미국인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라 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2018년 12월 22일부터 2019년 4월 7일까지 바로 그 뒤샹 전이 열렸다. 새롭다거나 처음으로 공개되는 그러한 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빛바랜 전시도 아니다. 전시된 작품은 전공에 상관없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특히 발상의 전환, 창작성과 개방성 사고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언제 보아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현재의 작품이며 동시에 뮤즈가 될 수 있는 교육 자재(資材)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감상은 그의 아이디어, 그가 작품을 통해 던지는 질문을 생각하면서 보면 더욱 재미가 있다.


뒤샹은 미술의 고전적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심하게 말하면 ‘미술의 종말’로 가는 다리를 만들었다. 뒤샹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작품 ‘샘’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17년, 가장 혐오하는 기기, 인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화장실 소변기를 성스러운 장소인 미술품 전시장에 전시하고자 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효과는 전시 그 이상이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를 전시장에 내놓고 대담하게도 미술품이라 우겼던 것이 큰 논란을 야기한 것이다.


뒤샹은 “나는 미술이 나쁠 수도, 좋을 수도, 혹은 그저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형용사를 쓰건 우리는 그것을 미술이라고 불러야 하고, 나쁜 감정이 여전히 감정인 것처럼 나쁜 미술 역시 미술이라고 생각한다.(뒤상의 창조적 행위에서)”라 말한 것에서 그의 미술 개념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소신을 볼 때, 소변기 사건은 비록 계산된 기획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연한 발상 또한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때,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사실 그의 정신은 혁신적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뒤샹은 이보다 심했다. 그는 입체주의 그룹에서 탈퇴하고, 기존의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는 개혁성 개발에 점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바꾸었다. 남성인 뒤샹이 여성 이름으로 바꾸었다. 스스로 ‘로즈 셀라비(Rose Selavy)’라 개명한 것은 자신을 바꾸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발로로 보이지만 말장난으로도 보인다. 로즈 셀라비는 ‘사랑, 그것이 인생이다(Eros, c’est la vie)‘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뒤샹은 시각적이건 언어적이건 동음이의(同音異義)와 같은 말장난을 좋아했다. 이러한 버릇은 향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190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샹은 1912년부터 종래의 회화기법과 ’화가‘ 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미술가가 작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기 시작했다. 1912년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어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했고, 1913년에는 레디메이드인 〈자전거 바퀴〉를 만들었으며, 1917년에는 그 유명한 오브제 〈샘〉이 발표되면서 대중적 논의가 촉발되었다.


더러움의 상징인 소변기 〈샘〉은 혁신적 발상의 아이콘임과 동시에, 미술에 대한 종래의 전통적 개념은 버려야 할 ‘쓰레기’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뒤샹 이전에도 피카소를 비롯한 다수의 모더니즘 미술가들이 유사한 미술 행위를 하였으나 뒤샹의 ‘소변기 사건’만큼 노골적이고도 적나라(赤裸裸)한 경우는 없었다. 뒤샹의 생각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선택하여 사인을 하고 전시장 전시대에 올려놓는 것으로 미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도 작품 생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확대하여 해석하면 어떠한 아이디어라도 미술가의 행위는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샹은 1920년대 이후부터 엉뚱하게도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어 약 20년간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술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회전하는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등 공학과 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동식 미술관’ 〈여행가방 속 상자〉 등 미술인지 장난감인지 경계가 모호한 아이디어 제품을 선보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원로 아방가르드 미술가로 그 명성이 널리 펴졌을 뿐 대중은 20여 년 간 묵묵해 온 그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1968년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오라마 작품 〈에탕 도네〉가 공개되자 20여 년의 공백을 매웠음과 동시에 그의 일관된 혁신적 작품성이 더욱 각광받게 되었다.




▲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뒤샹, 148.1x91.8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셀라틴 실버 사진에 흑연, 펜에 검은색 잉크, 검은색 물감, 색연필 혹은 크레용, 푸른색 물감. 신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자신만의 입체주의를 시도한 작품이다.



☛ 뒤샹은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수천, 수만 년의 미술사, 아니 장르를 불문하고 처음 나타난 혁신의 아이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말 그렇다. 그는 기존의 생각을 용감하게도 사정없이 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미 1300여 년 전에 뒤샹보다 조금도 못지않은 용감한 혁신가가 있었고, 그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 신라의 원효대사(617-686)이다.


대사는 한 스승을 모시고 오랫동안 수학한 일이 없어 구도심(求道心)에 불타던 중 의상과 같이 당(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두 스님은 선박으로 가기 위해 당항성(사적 제217호, 경기도 화성시 소재) 근방의 해변에 이르렀을 때 예상하지 못한 비를 만나 어느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대사는 잠결에 목이 말라 주위에 마실 물을 찾다가 바가지 안에 물이 있어서 즐겁게 마시고 다시 잠을 잤다, 아침이 되어 간밤에 마신 바가지를 확인해보니 그 바가지가 해골임을 알게 되자 원효는 곧바로 구역질을 하게 되었다. 간밤에 맛있게 마신 물이 아침에 더러운 물이라 생각하니 구역질이 난 것이다. 대사는 여기서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一切唯心造)’는 역발상으로 자신의 화두를 깨닫게 되자 당으로의 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신라도 되돌아왔다.


이렇게 신라로 돌아온 대사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바꾸었다.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누구나 불교에 귀의할 수 있는 불교 대중화를 시작한 것이다, 엄격하게 지켜온 계율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본격적으로 저잣거리 민초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귀족보다 시정잡배(市井雜輩)들과 어울렸고, 노래하고 춤추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니며 대중을 교화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귀족사회와 상류층에서만 신앙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시켜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 뒤샹의 수염이 있는 모나리자. 2018년 10월 21일 파리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약 84억 4천 만 원에 낙찰되었다.



☛ 대사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 큰 배움을 얻고 자신의 관점을 바꾼 천재이다. 뿐만 아니라, 약 1400년 전 국교가 불교인 신라에서 전통 불법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용감하게 버리고 중생을 구제한 영웅이다. 사실 대사는 불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불교의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달리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역발상으로 관념, 관점을 달리 했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뒤샹의 혁신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 관점상의 문제, 즉 역발상이며, 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에게는 이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선행자를 따라 강물에 뛰어드는 레밍 무리를 보고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 인간도 남을 따를 때 편안함을 느끼는 일면이 있는 것 같다. 잘 길들여진 가축같이 비록 전쟁터라도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따르게 된다.


이러한 습성은 서화가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통의 길을 따르면 쉽기도 하며 안전감을 느끼고 마음이 편해지나 혁신의 길은 불안하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전통의 길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 이것은 배워야 하고, 배움에는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인내가 있어야 한다. 반면에 뒤샹과 원효대사가 그러했듯이, 역발상으로 얻어지는 혁신은 배우거나 지켜야 할 아무것도 없기에 즐기면서 할 수 있으며, 기존의 것이 없기에 하는 것마다 ‘창작’이다. 그래서 ‘전통은 쉽고 혁신은 어렵다’가 아니라 ‘혁신은 쉽고 전통은 어렵다.’이다. 그리고 유연성만 있다면 원효 대사가 그랬듯이 배움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뒤샹의 물질세계나 대사의 정신세계나 혁신의 길은 결국 관점을 바꾸는 것에 있다. 천 수백 년 전, 우리의 원효대사야 말로 혁신, 역발상의 아이콘이 되어야 했으나 당시의 대중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관련 기사, 海潭의 書藝漫評

. (14) 디지털 기술은 서실의 공간을 넓혀준다,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956
. (13) 『조선, 병풍의 나라』 전에 감사드린다,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924
. (12) 『논어』 2.4의 “不踰矩" (2),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743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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