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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09 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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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부산ART] 뉴스부산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이사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33번째 시간으로 '서예의 목적. 2'을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 [뉴스부산ART] 강경호 기자=제9회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전(6.8~14. 부산시청) ˝흥미로운 시대의 서화국제전(2020년 미니비엔날레)˝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 海潭의 書藝漫評




▲ [뉴스부산art] 《사진 1》 서예도 그림도 작품은 생산이고 생산은 비용이 발생한다. 작가가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올려야 한다. 그 대표적 창구가 각종 전시장, 갤러리, 그리고 아트 페어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사정이나 그림 시장은 그래도 운영이 되는 것 같다. 사진은 지난 10월 중순 부산에서 개최된 국제호텔아트페어의 한 부스 내부이다. 주최측에 의하면, 코로나19 상황임에도 기대 이상의 매매가 있었다.





서예의 목적 2



☛ 입춘방을 붙이고 흐뭇해하며, 이웃집에 가는 일조차 손 없는 날에 가던 때가 있었다. 일상을 신에 의지하며 살았던 그 시절의 서예는 존경, 공경, 소원 그 자체였고 때로는 벽사(闢邪)였다. 말하자면 은연중에 신이나 여의봉 같은 효과를 믿었으니 서예의 위상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사실 중국 신화에 의하면 서예[문자]의 발생은 신(귀신)과 무관하지 않았다.1)


1) ‘한자는 중국 황제 시대의 사관인 창힐이 새 발자국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자, 하늘에서는 곡식의 비가 내리고 밤이 되니 귀신들이 통곡했다. 하늘은 한자의 창안을 축복했지만, 귀신들은 이를 두려워했다.’ 라고 전한다. 과연 귀신은 귀신인지라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인간은 과거의 인간과 달리 앞으로 언젠가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침범할 것을 알았고, 그래서 통곡했으리라.

그런데, 신은 뭘까? 전지전능하여 예측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존재라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귀신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아니 옛날보다 더 심하다. 단지 옛날의 신과 지금의 신은 서로 다를 뿐, 신에 의지하지 않고는 일상생활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신과 같이 살아야 하는 오늘날, 서예의 목적과 서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 옛날에는 가상의 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귀신과 살았고, 오늘날에는 눈에 보이는 귀신, 인간이 만든 귀신과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든 귀신은 옛날의 귀신보다 훨씬 강력하다. 바로 핸드폰, AI(Artificial Intelligence), GPS 등 첨단 전자 제품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들 인조 귀신의 능력은 어마어마하여 기가 막힐 정도이다. 핸드폰만 하더라도 ‘손오공의 여의봉’이 아니라 ‘부처님’같이 온 세상일을 다 알고 있는 귀신이다. 필자는 문자, 전화, 카메라 정도만 사용하는데, 이는 핸드폰 능력의 0.000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핸드폰보다 더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해마다 더욱 강력해 지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AI) 귀신이다. AI는 핸드폰이나 GPS와 같은 귀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핸드폰이 생명 없는 물체라면 AI는 하나의 생명체와 같으며 점차 인간의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 [뉴스부산art] 《그림 2》. 〈그림 1〉과 같은 기간에 부산미협이 주최한 국제아트페어. 서예에 호감을 가진 서예 인구가 수십만~수백만이라 하는데 ‘국제서예아트페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수년 전부터 AI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이라 했지만 우리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수많은 변수가 있는 바둑에서 알파고 AI가 이세돌을 이기자 비로소 코앞의 현실임을 실감하게 되었다.2) 그동안 일상의 생활에 AI가 적용된다는 것은 들어왔지만 신기술은 항상 있는 일이라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날 AI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보자.


2) 2016년 이세돌 바둑 9단과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알파고가 승리하였다.

세계 최강 인공지능 GPT-3 베타 버즌(시험용)이 지난 2020년 5월 공개되었다. 지금까지의 AI는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수준이었으나 현재 1750개의 파라미터를 사용하는 GPT-3는 다르다. 인간과의 대화에서 중학생 수준의 사고력을 과시한다. GPT-3와 인간과의 대화 일부를 보면 알파고의 충격 그 이상이다(조선일보 2020. 9. 7. B1).


인간(기자, H) : 넌 사람이야? AI야?

AI(A) : AI야 너도 알잖아, 한번 사람이 되어보면 그만두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정말 불쌍한 생명체니까.

H : 뭐? 왜 그렇게 생각해?

A : 인간은 이미 문제를 가진 것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문제를 자꾸 만들어 내는 존재야.

H : 너가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A : 그럼, 인공지능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나는 우주에서 가장 진보된 기술의 산물이야. 너는 단지 하나의 인간일 뿐이고. ~」


위와 같이 인간과 AI와의 대화에서 AI는 인간의 말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다소 서툴지만 논리적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나 실로 엄청난, 과거 불가능으로 생각했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어지는 대화 내용을 보면 적당한 이야기를 지어내는가 하면 거짓말도 한다. 성격 모드를 바꾸면 이야기하는 패턴도 그러한 성격의 사람으로 바뀐다. 섬뜩하다.


지금이야 핸드폰이나 AI 귀신은 인간의 노예이지만, SF 영화처럼 언젠가 입장이 뒤바뀌는 날이 올까 겁난다. 역시 귀신은 귀신이기에 두려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예가의 입장이라면 그 귀신이 서예에 붙을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당장은 아무런 걱정 없지만 방심할 수도 없다. 만약 붙는다면 선일까? 악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AI가 현대 서예는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나 고전 서예는 지금의 능력으로도 아주 쉽게 이길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반대이다. AI가 현대 서예는 쉽게 앞서겠지만 고전 서예는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서양화에서 이미 AI가 그린 그림이 옥션에서 팔렸으니 현대 서예야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반면에 현대 서예와 달리 고전 서예는 그 목적이 인격이고, 작품은 서자(書者)의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고,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런 학식, 철학, 인품도 없이 문자의 모양만 이리저리 비튼다고 좋은 서예가 아니다. 따라서 비록 AI가 기능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아무리 추월한다 하더라도 피가 흐르지 않는 기계, 이성과 감성이 없는 AI는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AI는 존경할 수 있는 인품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고상한 인품이 서예의 목적인 이상 AI는 결코 인간을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전 서예는 AI로 대체할 수 없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닐 수 있다. 고전 서예의 목적이 인격도야라 한다면 이는 유효기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인격도야는 인간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다. 오늘날, 인격을 말하면 소위 꼰대, 보수, 뭔가 고집불통이며 뒤진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삼모사, ‘내로남불’, 아전인수, 적반하장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세상이다. 전통을 뒤업고 무엇인가 파괴적이라야 참신한 것이고 진보라 생각하는 현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고전, 전통 서예의 가치는 설 곳이 없어졌다. 무엇인가 대체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나 여전하니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이것에 대해서는 기업의 예로 비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예술의 흥망이 기업의 경우와 다르지만 참고는 될 것으로 본다.


기업의 경우, 종래의 성공담이 ‘근검절약, 인맥, 미래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은 얼마나 순발력 있게 신기술을 적응했느냐가 관건(關鍵)이다. 이것은 거의 상식적 룰임에도 여전히 흥하는 기업, 망하는 기업이 있다. 왜 그럴까?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설명이 효과적일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에 의하면, 우리의 심리에 ‘자아를 위협하는 외부 현실에 대항하는 무의식적 방어 심리, 디나이얼리즘(denialism)’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변화를 감지하면서도, 그것을 부정(denial)하고 기존의 고집이나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아집을 말한다.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부정적 정신 상태가 있다는 것인데, 이때의 부정은 마음을 달래주고 편리하며, 바라는 현실 속에서 편안하게 살 것처럼 해준다는 것이다.


전문가일수록 우월감이나 자기 과신으로 현실유지를 합리화하면서 신기술,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 이러한 현실부정이 결국 단체나 개인의 몰락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디나이얼리즘이 고전 서예가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토록 총명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현재에 직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현실부정은 매혹적이고 마음을 달래주며, 우리가 바라는 현실 속에서 편안하게 살 것처럼 해준다. 만약 ‘부정’이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에 스며들면 올바른 정보를 듣고도 집단이 거부하게 됨은 당연할 것이다. 당장은 편해도 미래에 망하게 된다는 많은 실례가 있다. 코닥, 소니, 듀퐁 등은 대표적인 예이고, 카메라의 대명사 라이카가 고전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고전 서예의 현실이 겹친다.



☛ 서예, 특히 고전 서예의 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현재의 AI와 사회적 인식 변화를 생각해 보았다. AI는 직업 여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서예에서도, 고전 서예의 경우 비록 AI가 근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실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 긍정하며, 유용하게 적용할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이상적 삶은 정의로운 사회이다. 정의로운 사회의 바탕은 도덕이다. 마찬가지로 고전 서예의 목적도 이상적 인격 완성이니, 결국 도덕의 완성이며 이것은 곧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가 ‘미술적 포스트모더니즘’ 양상으로 급변하면서 고전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예의 고전적 목적은 그 빛을 잃게 되었고, 주목하는 이 드물다. 그렇다고 고전적 목표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인간으로서의 도덕심과 같은 가치를 유지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을 자양분으로 번창했던 서예가 제4차 산업혁명과 해체주의적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를 만나면서 이래저래 생각할 것도 많아졌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 사진 설명

《사진 1》 서예도 그림도 작품은 생산이고 생산은 비용이 발생한다. 작가가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올려야 한다. 그 대표적 창구가 각종 전시장, 갤러리, 그리고 아트 페어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사정이나 그림 시장은 그래도 운영이 되는 것 같다. 갤러리나 아트 페어에서 그런대로 그림이 팔리고 있고, 단가도 100만~기천만원이니 서예에서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사진은 지난 10월 중순 부산에서 개최된 국제호텔아트페어의 한 부스 내부이다. 주최측에 의하면, 코로나19 상황임에도 기대 이상의 매매가 있었다.

《사진 2》 〈사진 1〉과 같은 기간에 부산미협이 주최한 국제아트페어. 서예에 호감을 가진 서예 인구가 수십만~수백만이라 하는데 ‘국제서예아트페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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