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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0-07 14: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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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부산] 몬티첼로, 토머스 제퍼슨의 저택. 18세기, 미국 버지니아의 살료스빌(Charlottesvil)에 있다. 198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사진=오후규 제공




海潭의 書藝漫評(8) - 제퍼슨의 묘비명



☛ 9월은 벌초의 계절이다. 벌초는 힘든 일이라 원근을 불문하고 문중 일가가 모여 함께 일한다. 벌초에 동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가 간의 촌수도 알게 되고 사이도 돈독해진다. 선대의 묘가 대부분 산중에 있기에 조금이라도 거들자는 생각으로, 필자도 집안 벌초에 동참했다.


해마다의 풍경이지만 칡과 억새풀에 점령당한 묘는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벌초를 하고 나서야 기억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마 2~3년만 벌초하지 않으면 코앞에 두고도 분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같은 심정이었던지, 벌초를 마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7촌 조카 한 명이 우리 후손들은 벌초를 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한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조카가 과거 남의 묘를 두 번이나 벌초를 하였고, 작년에는 남이 우리 묘를 벌초를 하였던 것을 들먹인다. 벌초는 고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여 자식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자식은 선대의 묘를 알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도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았고, 자신마저도 해마다 벌초를 하는 묘만 알 뿐, 다른 묘는 잘 모른다.


그런데 벌초를 오갈 때마다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길목에 있는 00 가문의 묘이다. 7~8년 전, 본래 없었던 묘비를 세우는 등 온갖 석물로 치장하여 엄청 웅장하게 개조하였다. 실묘(失墓)를 염려한 비석 정도가 아니라, 왕이나 사대부의 묘에서나 봄직한 귀부(龜趺), 이수(螭首)가 있는 대형 비석이며 넓은 묘지와 각종 석물로 위압감마저 들게 한 것이다. 물론 이곳만이 아니라 비슷하게 꾸민 묘가 여기저기 쉽게 보인다.


석물에 제한이 없어진 현대에서 조상의 묘를 근사하게 꾸미고 싶은 것은 상정(常情) 일 것이다. 그런데, 서예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묘비를 보는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묘비, 비석은 바로 서예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석 문화가 없었다면 서예도 없었을 정도로 비석은 서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국 한(漢) 이후의 비석, 당(唐)의 집자성교서, 고구려 호태왕비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서체 교본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비문은 서예의 모태이며 골격이기는 하나, 본고는 서예미나 서예사적 면에서의 비문이나 비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길가에 있는 어떤 묘의 석물을 보고 글을 쓰는 서예인의 입장에서, 현재의 시대상을 작고 가볍게 생각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서양에도 당연히 비석은 있으나 비석 문화가 발전된 동양과는 다르다. 동양의 비는 비에 새긴 글의 내용이나 세우는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순수비, 신도비, 묘갈, 묘표, 능비, 기념비, 송덕비, 효자비, 열녀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묘비는 것이나 대상인의 이름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한 수단이니, 어떻게 보면 사자(死者)의 명함에 상당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사자이니 현재의 직책이나 직장, 주소가 없으니 이름과 더불어 생몰년(生沒年) 정도로 족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비석의 전통적 목적이 효심의 표현으로 죽은 사람의 공적 등 이력을 돌에 새겨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한 것, 달리 말하면 가문의 영광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보니, 축사가 그러하듯 그 내용이 과장되는 경우도 있고 거짓이 기록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폐단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후한(後漢, 獻帝時代建安十年, AD205)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조조(曹操)는 비석 건립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비문의 과장 이외에도 관리들의 횡포나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도 있었겠지만, 비석의 긍정적 효과에 비하여 그 폐단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 효과는 서예의 발전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상에 대한 효심, 가문의 영광을 영원히 전하고 싶은 마음은 지극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묘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의 명문장가, 명필가를 찾게 되었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문장과 서예의 발전이 뒤따르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나온 서예사이며 오늘의 서예이기 때문이다.



☛ 어떤 묘의 석물을 보고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서예를 생각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석물이 호화롭게 되는 것은 갑자기 오른 땅 값의 영향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의 가문문화, 양반문화, 더 크게는 유가문화의 정신유산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석에 관한 한, 양적 통계는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단연 앞설 것이나 아이러니하게도 명문이나 명필이 많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비석도 옛날과는 달라져 가고 있다. 형식은 닮고자 하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비석 제작은 전통적 수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석물상에서 컴퓨터 작업으로 끝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의 비석문화는 사자에 대한 효심, 가문의 영광을 전하고자 하는 것에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그 제작이 옛날과 달라 서예(미)의 발전과는 무관해지고 있다.


세상의 묘비명에는 재미있는 것, 훌륭한 것도 많으나 그중에서 으뜸이라 생각되는 것은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 ~ 1826)의 묘비명이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기라고 하였고, 유족은 그의 말에서 한마디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국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 기초자이며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자인 토머스 제퍼슨이 여기에 잠들다.”


정말 대장부만이 남길 수 있는 멋진 유언이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유족들은 더없이 훌륭했다. 평범한 사람, ‘옆집 아저씨의 묘비명’ 정도로 소박하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이 누구인가? 과학자, 농학자, 언어학자, 교육자, 도시계획가, 건축가이며 정치가였다. 더구나 그는 8년(1801~1809) 동안 미국 제3대 대통령 직을 역임했다.


그의 업적을 우리 식으로 자랑하면 십 수권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단 한 줄로 요약하였고, 그 내용은 ‘자유’, ‘평등’, ‘교육’을 통한 번영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력 직은 아무런 자랑거리로 생각하지 않았고, 미국과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인격을 누리며 잘 살아갈 수 있는 초석을 제공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을 뿐이다.


여기저기 솟아 있는 묘비를 보는 마음, 이래저래 가볍지 않았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관련 기사, 海潭의 書藝漫評

. (7) 韓國人이 본 日本[人]과 日本의 書藝,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1972

. (6) 용감한 서예가,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1972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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