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潭의 書藝漫評
(1) 서예를 하면 행복할까?
Ⅰ.
서실에 학생이 줄어들고 공모전도 시들하여 서예가 사양 길에 접어들었다 한다. 그러나 해마다 서예 작가는 증가하고 서예전도 많아졌다는 점에서 보면 여전히 성장 일로이다. 정말 전시장 구하기 힘들 정도로 서예전이 많다 보니 전시장에도 자주 가게 된다.
전시장에서 목표를 둔 서예가의 작품을 보게 되면 행운이다. 지속 가능한 목표를 가진 작가는 작품에 열정을 다하게 되고 그것이 감상자의 눈에 보일 때 가슴을 울리게 된다. 지난 9월 29일 부산 어린이 대공원 교문 갤러리에서 대한민국 명인 청악 이홍화(靑岳 李弘和)* 선생님의 퍼포먼스* 겸 휘호가 있었다. 바닥에 깔린 대형 백지(1.8m x 20m)를 순식간에 작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청악을 보며 서예와 서예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청악 이홍화(靑岳 李弘和) - 예술학 박사, 개인전 17회, 김천시 문화상 수상(2006년), 자랑스런 시민상 수상, 청악 미술관 개관(2005년), 대한민국 “대한명인” 추대(146호).
*퍼포먼스 - (사)대한민국 서화디자인협회 회원전 개막행사에서 이루어 졌다. 여기서 청악은 관람객에게 기증하기 위한 소품 및 초대형 작품 휘호를 하였으며, 서예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는 등 대중과의 소탈한 대화를 가졌다.
Ⅱ.
먼저, 작가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일에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소 휘호와 함께 보여준 청악의 행복 가득한 표정, 밝은 미소, 소통하는 성품, 그리고 서예에 대한 사랑은 명인의 덕목으로 보였다. 프로(professional)이면서도 서예를 돈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더 많은 사람에게 서예의 묘미를 알리고 싶어 하는 열망만이 가득했다.
목표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과정이며 결과에서 대단히 차이가 난다. 목표가 있을 때 의욕, 끈기, 열정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의 열정은 성냥불과 같이 곧 소멸된다. 기업이 사회 친화적 목표를 가질 때 지속적 성장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도 더불어 살고 있는 사회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목표를 가질 때 자신의 일에 행복을 느끼며 초기의 열정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서예로 사회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이다. 감상자의 기대에 부응하며 예술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서예 활동을 사회 친화적 서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서예를 할 수 있을까? 기업 경영자는 자신의 기업이 지속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예에서도 이를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는 것은 서예의 열정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한 때 타이프라이터, 미싱, OHP, 코닥필름, 워크맨, 소형 카메라 등이 불멸의 제품 같았지만 WP(word processer), 대량생산, 컴퓨터, 디지털, 핸드폰 등의 등장과 더불어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삼성의 핸드폰이나 현대의 승용차에서 알 수 있듯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회 친화적 기업이라도 살아남으려면 시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해 가야 한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 소설은 물론이고 음악, 회화에서도 시대성을 반영하여야만 살아남는다. 심지어 역사나 다큐멘터리 영화도 시대성을 반영하지 못하면 흥행에서 밀려나고 만다. 물론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예외가 있기에 희망이 있고 재미가 있듯 일률적으로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시계는 좋은 예이다. 디지털이 고도로 발전된 오늘날에도 아이러니하게 정확하지도 않은 기계식 시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대의 최고급 기계식 시계는 꾸준하게 잘 팔린단다. 시계는 정확성이 생명이나, 정확한 시계는 핸드폰에도 있고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으니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보다는 기계식 시계가 주는 느낌, 정감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손 글씨인 서예의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스스로 발전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또 그것이 트렌드에 맞아야 할 것이다.
(전통)서예는 감동적이었지만 너무 오랜 기간 보아왔다. 이에 반항하여 20세기 초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것은 소위 ‘현대서예’였다. 천재적 작가가 선두에 나섰지만 ‘현대서예’ 그 자체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감성을 유발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전통서예’와 너무 달랐던 것이 외면당한 일차적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실패한 것도 아니라 본다. 현대서예의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서예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게 하였다. 전통 일색이었던 서예가 자연스럽게 지금과 같이 분파되고 세분화되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전된 것은 현대서예의 영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변화는 발전의 다른 표현이라 할 것이다.
Ⅲ.
청악의 퍼포먼스로 시작하여 바람직한 서예인, 그리고 서예의 창작으로 이어졌다. 창작은 어떤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형의 서체는 너무 익숙한 서체를 말한다면 창작은 정형의 서체를 파괴하는 데서 시작된다. 서예의 힘, 잘 쓴 서체라는 것은 결국 재미가 있어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글씨이고, 이들 글씨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정형의 서체에서 벗어난 글씨일 것이다. 그런데 서예 창작이 어려운 것은 정형에서 벗어나되 문자라는 테두리 내에 있어야 한다는 서예의 본질적 한계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다. 문자나 문장 그 자체가 이미 작품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심정 혹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말은 많지만 왕희지 이래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고인들이 서예를 자족(自足), 기인(其人), 회포를 푸는 것[散也] 등이라 했음을 이해하고 그 솔직한 표현에 공감한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 즐기는[自樂]’ 서예라 하더라도 전시장에 나오는 이상 오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예를 위해서는 서예에 대한 개인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고, 그 목표가 사회 친화적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유행하는 캘리그래피, 각종 재료와 기법을 수용하는 서각, 각종 서화 응용 작품 등은 서예가 대중적 공감을 얻으며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 변화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왕성해지면 상대적으로 전통서예는 소멸될 것으로 생각되나 오히려 가치 있게 살아남을 것이다. 아무리 한글 전용 시대라 하더라도 한자를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주요한 것은 서예를 하면 행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조금 행복할 것이나 아주 행복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는 서예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으며 작가의 의지나 정감을 펼치는 소극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 친화적 서예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각오를 달리한다면 콜럼버스와 같은 역발상, 끈기, 열정이 생겨날 것이며 크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일상으로 스트레스 쌓이는 요즘의 삶에서 서예작품 감상으로 감상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사회 친화적이고 지속 가능한 서예이다. 그리고 그 작가는 이미 목표를 가진 행복한 작가로 상당한 사회적 공헌을 하고 있다 할 것이다.
모든 지식이 공개되어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 차이를 낸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생각하며 연결하느냐의 문제이다. 서예로 부자 되기는 어려워도 행복해지기는 의외로 쉬운 문제일 수 있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